1. 격구의 기원 – 신라 왕실의 귀족 스포츠
‘격구(擊毬)’는 고대 동아시아의 귀족 계층에서 성행했던 말 위의 공놀이로, 특히 신라 시대 왕족과 귀족들의 대표적 여가 스포츠로 기록되어 있다. 격구는 말 위에서 채를 이용해 공을 치며 득점을 겨루는 방식의 경기로, 격구(擊毬)라는 이름은 문자 그대로 ‘공을 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서 군사 훈련과 신체 단련의 기능까지 겸비하고 있었으며, 귀족 사회에서 지위와 품위를 상징하는 놀이로 여겨졌다.
신라에서 격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고대 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경덕왕(재위 742~765년) 때에는 격구가 왕실 주도의 공식 행사로 자리잡았으며, 이를 통해 왕족과 귀족들이 기량을 겨루며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격구는 또한 궁궐 안 마당이나 넓은 평지에서 행해졌으며, 이를 위한 전문 경기장도 존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격구는 단순한 놀이를 넘어 신체 능력과 전략, 협동심을 모두 요구하는 고급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또한, 격구를 통해 귀족 자제들은 말 타기, 무기 다루기 등의 군사적 훈련 요소를 익힐 수 있어 귀족 교육의 일환으로도 기능했다. 이는 격구가 단순한 오락을 넘어서 당대의 문화적, 정치적 구조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2. 격구의 경기 방식과 구성 요소
격구의 경기 방식은 말을 탄 상태에서 채(杖)를 이용해 공을 쳐서 상대 진영에 넣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격구에 사용된 채는 나무나 금속으로 만들어졌으며, 길이는 사람의 키만큼 길었고 한쪽 끝은 공을 치기 쉬운 둥글거나 편평한 모양이었다. 격구용 공은 가죽이나 동물의 내장, 또는 나무를 이용해 만들었으며, 크기는 현재의 야구공보다 약간 작았다.
경기는 보통 두 팀이 나뉘어 대항하는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각각 일정 수의 기수를 배치해 서로 공을 쟁탈하고 득점했다. 경기는 시작 전에 심판의 신호와 함께 시작되었고, 규칙은 비교적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으며 반칙 시에는 페널티나 실격 처분도 존재했다. 단순히 공을 많이 넣는 팀이 승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 내에 전략과 기량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 중요했다.
격구는 격렬하고 역동적인 경기였기 때문에 부상 위험도 존재했다. 따라서 참가자들은 보호 장비를 착용하거나, 경기 전에 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격구장은 평지이거나 모래로 다져진 바닥이 일반적이었으며, 관중석이 따로 마련된 경우도 있었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화려한 장신구와 채의 장식, 말을 꾸미는 문화도 동반되어, 하나의 의전과 시각 예술의 형태로 승화되기도 했다.
이처럼 격구는 경기의 형식미와 예술성을 동시에 갖춘 놀이로서, 신라 귀족 사회의 정치적·문화적 수준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귀족 스포츠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3. 격구의 문화적 의의와 정치적 역할
격구는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서 신라 귀족 사회의 상징적인 문화 코드로 작용했다. 왕족과 고위 귀족들만이 격구에 참여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귀족 사회 내부의 결속과 서열을 확인하는 정치적 장치로 기능했다. 격구는 종종 국왕이 직접 참관하거나 주최한 대규모 행사에서 시행되었으며, 이러한 공식 경기에서는 정치적 메시지나 권위 과시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왕이 격구에 참가한 귀족에게 포상을 내리거나, 특정 가문을 초청하는 방식은 정치적 유대 형성과 충성도 확인의 수단으로 해석될 수 있다. 격구는 또한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도 기능하여, 국왕이 무예와 기량을 보여줌으로써 군사적 능력과 지도자로서의 위엄을 강조하는 효과를 냈다.
신라 말기에는 격구가 민간으로 확산되며 중하층 귀족이나 장교층 사이에서도 유행하게 되었고, 이는 격구가 군사 훈련의 일환으로도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격구는 기병술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어, 실전 무예로서의 효용성도 높았다.
문화적으로는 격구가 회화, 시문, 문학작품 등에 자주 등장하며, 신라 귀족 사회의 풍류와 미의식을 반영한 소재로 활용되었다. 이로 인해 격구는 스포츠이자, 정치, 문화, 군사 영역이 융합된 복합적인 상징체계로 신라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4. 격구의 쇠퇴와 현대 스포츠와의 연결 고리
신라 이후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격구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여전히 일부 귀족층과 무신들이 격구를 즐겼으나, 유교 중심의 사회 체계가 강화되면서 무예성 짙은 오락은 점차 억제되었고, 이에 따라 격구도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국왕이나 관료들이 무도보다 문치를 중시함에 따라 격구는 더 이상 공식 행사에서 볼 수 없는 놀이가 되었다.
그러나 격구의 유산은 오늘날 국제 스포츠 ‘폴로(Polo)’와 놀라운 유사성을 보인다. 폴로는 말 위에서 공을 치는 경기라는 점, 팀 단위로 경쟁한다는 점, 전략과 협동이 필요한 방식 등에서 격구와 거의 흡사하다. 실제로 학자들 사이에서는 격구가 동서양의 교역과 문화 교류를 통해 중앙아시아, 페르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다는 설도 제기된다.
현대 한국에서는 격구가 사라졌지만, 말타기 체험, 전통 무예 복원, 전통 스포츠 재현 등의 움직임을 통해 그 흔적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궁중무예와 민속축제에서 격구 복원 시연이 진행되며, 격구가 단지 과거의 놀이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잇는 문화 콘텐츠로 재조명되고 있는 중이다.
격구는 신라의 고귀한 문화와 풍류정신을 담은 귀중한 유산으로서, 오늘날에도 역사적 자긍심과 정체성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전통 놀이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